As deceptive as stasis, as being as cruel

정체성 만큼이나 기만적인, 실제 만큼이나 잔인한 

  

​작가노트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기질 중 하나가 불안이다. 인간은 불안을 벗삼아 그것을 추진력으로 이용하기도, 자칫 주도권을 잃고 불안에 잠식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언제나 이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불안은 (불가피하게) 갈수록 더 친숙한 감정이 되어간다. 불안을 매 순간 안고 가야 하는 이들은 그것과 공생 하기 위해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들을 한다. 그러한 행위들 중 하나가 현실 도피이다. 나는 나의 작업에서 현대인이 감정적 현실 도피를 위해 취하는 행위들과 그들의 심리 상태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이번 신작 ‘정체성 만큼이나 기만적인, 실제 만큼이나 잔인한’의 제목은 미국의 극작가인 테네시 윌리엄스 (Tennessee Williams, 1911~1983)의 작품 ‘유리동물원’의 등장 인물인 탐 윙필드에 대한 영국인 소설가 크리스토퍼 빅스비(Christopher Bigsby) 의 표현 중 일부이다. ‘유리동물원’은 테네시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30년대 세계 경제공황 시기, 미국 남부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을 그리는 회상극이다. 이 극의 인물들은 모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신만의 허구적 세계 속에 안주한다. 빅스비는 탐 윙필드에 대해 ‘자신이 탈출했다고 생각했던 세계로 돌아가기를 계속하는 탐에게는 궁극적으로 도피처가 없으며, 이 극 역시 그가 그 세계를 몰아내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가 추종하는 유동성은 잠재적으로 정체성만큼이나 기만적이며, 상상력은 실제만큼이나 잔인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인간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또 다른 현실, 즉 픽션 혹은 재생산된 현실에 의지하곤 한다. 다양한 종류의 SNS와 대중 매체들은 현대인들에게 도피의 통로를 끊임없이 제공하며, 현실 도피 성향이 강할 수록 픽션에 대한 몰입도는 높아진다.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대의 도피로는 현대인의 현실인식을 급속도로 저하시켜 그들을 현실에서 유리시킨다. 이러한 현대인의 심리상태는 도피의 방식과 수단만 다를 뿐 테네시의 ‘유리동물원’의 등장인물들의 심리에서 잘 나타난다. 나는 테네시의 이상과 현실, 가치와 몰가치, 적응과 부적응, 죽음과 삶 그리고 현실과 환상에 대해 다룬 그의 작품들, 특히 ‘유리동물원’의 등장 인물과 음향, 조명, 투영 배경, 영사막 등을 이용한 그의 연출법에 영감을 얻어 이번 신작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번 신작에서 나는 현대인의 픽션(대중 매체)을 통한 현실 도피의 심리적 구조에 관해 테네시가 ‘유리동물원’에서 사용한 몇가지 연출법을 이용하여 영상과 공간 설치를 통해 이야기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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